당신은 스코어에 진심입니까?
일을 하다 보면 가장 예민한 부분이 스코어(타수)이다.
캐디는 네 사람의 마커나 다름없다.
그들의 정확한 스코어를 알고 있어야 한다.
내 자랑 같지만 나는 스코어를 정확하게 보는 편이다.
골프에는 '캐디 스코어'라는 말이 있다.
재미있게 놀러 온 고객들이 스트레스받지 않고
기분 좋게 골프를 즐기다 가시라고 점수를 알아서 줄여주는 것이다.
그런 고객들은 미리 말한다.
"알아서 적어 주세요~"라고 멋쩍어하면서 말이다.
그런데 내기를 하거나, 본인의 찐 스코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
정확한 스코어를 적어 주길 바란다.
내가 친 타수를 내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.
고객들 중에는 벌타를 제대로 계산하지 않거나
왔다 갔다 퍼덕이다 보면 금세 자신이 몇 개를 쳤는지 잊어버리곤 한다.
내가 스코어를 기억하는 방법은
클럽을 바꿔 줄 때 어디에서 뭘 쳤는지를 기억한다.
대부분 장면기억법을 쓰기 때문에
4명의 18홀 스코어 복기가 가능하다.
아마 대부분의 캐디가 그럴 것이다.
지금은 태블릿으로 스코어를 쓰지만 예전에는 종이카드에 스코어를 썼다.
바람에 날아가거나 이물질이 묻어 새로 써야 할 때도 종종 있다 보니
지나온 홀을 복기하는 건 습관처럼 배어있다.
또한 기억을 하고 있어야 고객이 클럽을 놓고 왔을 때 빠르게 찾을 수 있다.
고객은 자기가 쓴 클럽도 어디에서 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.
그렇게 20년을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몸에 장착되는 캐디의 직업병이다.
아무튼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나는 게 스코어라
정확하게 적을 수밖에 없다.
보통 고객들은 파, 보기에는 예민하지 않다.
그런데 트리플보기나 더블파로 넘어가면 굉장히 예민해진다.
스코어를 입력하는 순간,
"내가 왜 트리플이야!!" 하고 버럭 할 때가 많다.
그럼 일일이 하나하나 짚어 줘야 한다.
그러고 나면 탄성과 함께 "아, 맞네"
나는 유달리 그런 경험이 많은데 그렇게 3홀 정도 지나면
더 이상 스코어로 나에게 토를 다는 고객이 없었다.
스코어는 정확하게 적는 게 제일 쉽다.
어르신들을 나가면 "언니야~ 더블이상 적지 마라~"
이런 식으로 말하는데
그럼 진짜 더블 보기를 한 사람과 트리플 보기를 한 사람이 같은 스코어가 되어
누구는 줄여주고, 누구는 그대로 써야 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.
나중에 네 사람 스코어가 어느 정도 비슷하게 나오도록 하는 것도 캐디 능력이다.
또 어떤 고객은 정확하게 써달라고 하면서
진짜 정확하게 쓰면 기분 나빠하기도 한다.
선입견을 가지면 안 되지만
특히나 여성 골퍼들은 스코어에 더 예민하다.
본인들끼리 직접적으로 말은 못 하면서
뒤에 몰래 와서 나에게 얘기한다.
"저 사람 더블인데 왜 보기 적었어?"
자기보다 못 치는 사람이 스코어가 잘 나오면 그것도 불만인 것이다.
그래서 하나하나 짚어 말하면 표정관리를 못한다.
어떤 여자 고객은 트리플을 해놓고도 더블이라고 우기길래
하나하나 짚어 줬더니, 뭘 그렇게 일일이 따지냐며 기분 나빠 못 치겠다고
끝날 때까지 투덜거리기도 했었다.
어느 장단에 맞추란 말인가?
나는 내 스코어에 진심이다.
나는 라운딩을 가면 멀리건도 안치고,
특별히 위험한 경우가 아니라면 볼 터치도 하지 않는다.
나는 나의 정확한 스코어를 알고 싶고, 좋은 스코어를 내고 싶은 사람 중에 하나다.
만약 멀리건을 쓰고, 좋은 자리로 라이 개선을 하면서 볼을 치면
찜찜하고 내 타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
되도록 룰에 맞게 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.
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
고객들 중에 '라이프 베스트'라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
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곤 했다.
나는 알지 않는가?
그 고객이 어디서 멀리건을 몇 개 썼고, 어디서 볼 터치를 했는지 말이다.
아, 물론 찐으로 베스트 스코어를 낸 고객도 있다.
그럴 때는 나도 함께 기뻐하고, 축하도 아끼지 않는다.
골프장에 내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
지인들과 놀러 온 사람들이고, 어쩌다 한번 치는 주말 골퍼나
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비기너들이다.
그리고 대부분 안전을 우선하기 때문에 드롭하는 경우도 많다.
되도록 정확하게 타수를 세지만 그것이 100% 정확하다고도 할 수 없다.
그러니 즐겁게 놀러 와서 스코어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.
마치, 국룰인 것처럼
첫 홀과 마지막 홀은 올 파,
전, 후반 멀리건 하나씩,
OB, 해저드는 볼 찾으면 무벌 드롭
이런 식의 막무가내 룰을 정하고
캐디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는다.
진행도 안되는데 멀리건은 웬 말인가?
찾으면 무벌타라는 소리에 보이지 않는데도
끝까지 찾으려고 시간을 소요하다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.
제발 말도 안되는 소리 하면서 칠 거면
화라도 안냈으면 좋겠다.
화풀이는 다 캐디한테 하면서
안하무인인 고객들...
이제는 볼일 없으니 속이 다 시원하지만
아직까지도 힘들게 이런 고객들을 상대하고 있을 캐디들을
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.
자신의 리얼 스코어를 알고 싶다면
노 멀리건, 노 터치를 지키고
캐디 안내에 따른 로컬룰 적용과 골프의 정확한 룰을 적용하길 바란다.
멀리건을 치는 순간 리얼 스코어는 없다.
그러니 공이 잘 맞는다 안 맞는다는 이유로
동반자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.
세월이 흘러도 같은 패턴의 고객들은 끊임없이 나왔다.
위와 같은 말도 안되는 룰은 대물림되는 건지,
어디서 듣고 오는건지 20년째 이어오고 있다.
참 신기한 일이긴 하다.
그래도 조금은 좋은 골프 문화도 이어졌으면 좋겠다.
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.
고객들은 골프장 리뷰나, SNS에 캐디들을 난도질한다.
물론 진짜 진상 캐디도 분명 있다.
그런데 캐디들은 진상 고객을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다.
그냥 퇴근후에 캐디들끼리 술안주로 삼을 뿐이다.
누가 누가 더 진상인지 배틀을 떠도 모자라지만.
정말 케이스는 다양하게도 계속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이다.
전국의 모든 캐디들이 늘 즐거운 라운딩을 하길 바라며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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